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(문단 편집) === 유년시절 === 어린 시절 파스테르나크는 전형적인 예술가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꽃과 바람과 철학을 접하며 부유하게 자랐다. 이 집안에는 제법 저명한 예술인들이 드나들었는데 죄다 아버지 레오니트의 인맥들이었다. 그는 [[레프 톨스토이]]의 《부활》 등 소설의 삽화도 그려줬다. 톨스토이 의외에도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[[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]], 시인 [[라이너 마리아 릴케]], 철학자 레프 셰스토프, 그리고 그의 피아노 스승이자 이웃사촌이었던 '''[[알렉산드르 스크랴빈]]'''이 그의 집을 방문했다. 특히 릴케와는 그 뒤에도 서신을 자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. 스크랴빈은 파스테르나크의 첫 번째 동경의 대상이었으며, 12살의 파스테르나크는 그를 보며 장래에 음악가가 되리라 마음먹고 그에게서 6년 동안 열정적으로 [[피아노]]를 배웠다. 하루는 스크랴빈에게 자작곡을 직접 들려주었는데, 청취 후 즉석으로 곡의 이곳저곳을 손봐준 스승에게서 놀라움을 느낀 파스테르나크와 스크랴빈은 대략 이런 식으로 질답했다. >파스테르나크: [[바그너]]나 [[차이콥스키]]가 [[절대음감]]을 가지고 있었을까요? >스크랴빈: 뭐라고?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니? 그런 건 피아노 조율사들한테나 맡겨라.[* 파스테르나크의 자전적 에세이 《안전통행증》에서 발췌.] 무슨 소리인고 하니, 워낙 소심했던 보리스는 스크랴빈이 생각하기에 영 문제될 게 없는 것까지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. 자작곡을 들려준 것도 엄청난 용기였다! [youtube(-GrviOIUX7M)] 그 후 점점 음악에 자신을 잃은 파스테르나크는 스크랴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니던 음악 학교를 자퇴하며 음악을 그만뒀다. 스크랴빈은 제자의 가능성을 믿었고, 그래서 여러모로 그를 독려해 주었지만, 스스로 자괴감을 느꼈던 탓이다. 자신은 피아노도 스크랴빈처럼 칠 수 없을 것이고 악보도 잘 볼 줄 모른다고, 한마디로 열정만 있고 재능은 없다고 생각했다. 더욱이 그는 이 무렵 신비주의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은 하늘이 정해준 것이며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섭리라고 생각했다. 그러니 안 되는 걸 억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. 그는 1908년 [[모스크바]] 대학에서 법을 전공하지만 스크랴빈의 조언에 따라 1년 뒤에 철학으로 전과했다. 1912년에는 어머니가 한푼 한푼 모은 돈으로 아들을 [[독일 제국|독일]] 마르부르크로 [[유학]]을 보냈고, 그는 그곳에서 철학을 계속 공부했다. 그는 그곳에서 두 번째 동경의 대상이자 신칸트주의의 창시자인 '''헤르만 코헨'''(1842~1918) 교수를 만나며 또 한 번 정신적인 성숙을 이룩하지만 그 끝의 한계점에 부딪쳤다. 그는 코헨 교수가 오래 전 [[갈릴레오]], [[아이작 뉴턴]], [[라이프니츠]], [[파스칼]] 같은 사람들의 머릿속을 채웠던 고귀한 지식의 정수에만 기대는 모습이 못마땅했다고 한다. 게다가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아왔던 어떤 소녀를 좋아했다. 이름이 자세히 나오지는 않고 철자 V로 시작되는 듯하다. 그녀의 가족이 독일 여행 중 그가 있는 마르부르크에 들러 만나게 되었다. 하지만 머물러 있는 기간은 짧아서 파스테르나크는 그녀가 다시 떠날 즈음 황급히 사랑을 고백했는데, 안타깝게도 '''거절당했다'''. 그들이 베를린으로 떠날 때 그저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막무가내로 열차에 몸을 실은 그는 빈손으로 아무 볼 일도 없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황급히 소녀의 가족과 헤어지고 낯선 방에서 하룻밤을 지샌 후 다시 마르부르크로 돌아왔다. 이 사건은 파스테르나크가 독일 유학을 포기한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